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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합리주의 철학자로서 절대 진리를 추구한 인물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대화 중 상대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끝내 상대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 같은 시대에 상대주의적이고 유용한 진리를 추구했던 소피스트들도 있었 다. 이들은 주로 아테네 바깥 출신이었고 변론술과 수사학에 능한 지식 전문가 집단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지식, 즉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일상적인 정보가 아니라 정신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이 세상의 진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절대 진리 말이죠. 이와는 달리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돈을 벌기 위 한 지식은 참된 앎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강조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당시에 유용하고 상대적인 진리를 강조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소피스트 철학자들이죠.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겠죠.
아테네는 다수결 원리로 운영되는 민주정치 사회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중우정치라고 비판합니다. 중우(衆愚) 란, 말 그대로 바보 같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바보 같은 결정을 한다는 말이에요.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무지에 기초를 두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는 타락했고,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대신 철학자 집단이나 철인 군주가 권력을 쥐고 사회의 방향과 문제를 결정하고, 모든 사람이 그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는 철인(현명한 사람)정치를 주장했죠. 나중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철인정치 이론을 완성했는데, 그들은 이성에 기초를 두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치, 소수결의 정치를 바람직하게 보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의 물질적인 유용성을 비판하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사회 불안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되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당시 아테네의 적국인 스파르타의 체제와 유사한 면이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소수 군인 집단에 권력이 집중된 과두정치였으니까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다수결 vs 소수결, 민주정 대 과두정의 대립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위험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지죠. 아주 유명한 표현이에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악법을 인 정하는 것은 실정법(法) 사상에 입각한 것입니다. 실정법 사상이란 질서를 강조하는 시각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상이 자연법 사상이에요. 우리가 사회계약설에서 공부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권을 가진 이성적인 존재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이론이 자연법 사상 입니다.
실정법 사상을 따른다면, 악법도 법이니 질서 유지를 위해 지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이성을 중시했는데, 실정법 사상과 연결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 체제니까 소크라테스의 법정에는 여러 명의 배심원이 있었겠죠.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최후 진술을 오랜 시간 동안 했다고 해요. 배심원 한 명 한 명에게 계속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죠. 배심원들도 결국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만족해하며 “당신들이 지금 나를 사형할 것인지 결론 내리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최후 진술을 마쳤다고 합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가 유죄냐 무죄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다가 결국 간신히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형벌 종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어요. 그 뒤에 배심원들이 그것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었죠. 소크라테스는 사형, 추방형, 노예형, 벌금형 중에 일부러 사형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사형에 대한 찬반에서 찬성이 결정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진술에서 스스로의 무지함을 드러낸 배심원들이 자극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죄 판결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형에 찬성하다니, 모순이죠. 이 판결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중우정치임을 증명했다며 기뻐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때요, 그가 다수결의 허점을 제대로 짚은 것 같은가요?
이제 소피스트로 넘어갑시다. 소피스트의 개념은 소크라테스나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상대적이고 유용한 진리를 추구했다고 했죠.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차이점은,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이었지만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 바깥 출신이었다는 것이에요. 아테네는 제한적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외국인, 여자, 노예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죠.
소피스트가 등장하기 전에는 자연철학자들의 시대였습니다. 자연의 물질적 요소나 원리로 세상을 설명했었죠.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중심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가 바로 소피스트예요. 인간은 결국 개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사상에는 상대적주의적인 관점이 작용할 수밖에 없죠. 또한 소피스트들은 법정에서의 변호 등에 쓰이는 변론술과 수사학에 능숙했습니다. 말과 글을 잘 다루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인데요, 오늘날 변호사들의 전문 지식과도 비슷하지요?
하지만 이런 지식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상대성에 기초를 둔 지식이다보니 옳지 않은 경우에도 돈을 받고 누군가를 변호해 줄 수도 있죠. 현실의 유용성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상대주의는 나중에 회의주의로까지 나아갑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 진리'란 없다고 보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 중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왔고 상대와의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열망을 불어넣었다. 이로 인해 논쟁술이 발달했고 변론술, 수사학이 성공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로인해 논술의 대가인 지혜로운 자, 소피스트들의 세상이 도래한다. 철학계에서 이들의 가장 큰 공헌은 우주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돌렸다는 데 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로 인간의 감각, 이성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인간 개개인이 만물의 척도가 됨으로써 상대주의가 진리인 세상을 만든다. 고르기아스(Gorgias)는 저서 <비존재에 관하여>에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쳐도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회의주의를 전개시켰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해도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없으며 전달하더라도 그 의미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므로 정확히 소통을 할 수 없고 그렇기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로디코스(Prodicus)는 모든 사물에게는 적절한 이름이 있고, 또 모든 이름에게는 그에 걸맞은 적절한 사물이 있다고 주장했다.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는 정의는,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이라 주장하고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명한 이유는 자신이 아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가 무지함을 깨달아야 상대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그로인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대가 무엇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묻는다. 산파술이라 부르는 이 대화법은 상대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스스로가 진리를 자각하도록 돕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대화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보편적 진리란 존재하며 인간은 이 보편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자세는 진리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를 추구한 소피스트와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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