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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문해력_필수 배경지식

무정부주의

by PalBong's 202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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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 상태라는 표현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무정부 상태 즉 아나키 상태는 극단적인 혼란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에서는 무정부 상태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무정부주의는 무조건적인 사회 혼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의 억압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이런 억압이 없는 자율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국가가 인간을 억압해 왔으며, 정부가 그 억압의 주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국가와 정부가 없어지는 것이 사회가 해방되는 길이겠죠. 그런데 정말로 무정부주의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가 없어지는 것을 바랐을까요? 그건 또 아닙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서의 국가는 폐지하되, 공동체적인 네트워크나 어떤 조직 같은 것은 가능하다고 봤죠.
   유명한 무정부주의자로는 누가 있을까요? 해외에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이나 바쿠닌 같은 사람들이 있고 한국은 신채호, 이회영 선생 같은 분들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 선생 말입니다.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의열단 쪽은 민족주의 성향과 함께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했습니다.
   미셸 푸코도 빼놓을 수 없죠. 푸코는 기존의 국가 권력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정치 이론이나 철인정치 이론 등을 비판했어요. 이런 것들이 타율적인 정치 시스템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건 다른 정치건 간에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을 통치하게 되어 있고, 인간을 억압한다는 것이죠.
   자신이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 지킬 줄 아는 것이 자율입니다. 여러분들이 시험에 대비해 공부 계획표를 짠다고 생각해 보세요. 계획대로 실행하면서 중간중간 그 시간표를 다듬기도 하겠죠? 즉, 자기가 만든 규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잘 지키지 못하기도 하고, 그럼 고쳐서 실행하고. 이런 게 자율적인 존재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무정부주의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이상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부를 때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잖아요. 내 이름을 ‘비-승원’이라고 소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무엇인가를 규정할 때는 반드시 긍정적인 정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의 본질은 자율주의 혹은 오토노미즘(au-tonomism)이라고 표현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이론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자치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정치는 국가 권력의 다스림 아래 인간과 인간 사이에 타율적 관계가 성립하니까요.

잠깐, 이때의 자치를 ‘지방자치’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두 개념은 완전히 달라요.

민주주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있지만 정해진 임기 동안만 권력을 가질 뿐이고, 선거를 통해 계속 바뀌죠. 다시 말해 일반 시민들이나 대통령의 권한이 서로 다르지만, 대통령이 일반 시민이 되고 시민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죠. 이게 바로 동일성의 원리입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특징이죠. 전제주의 정치나 군주주의 정치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자율주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통치자와 피치자가 분리되지 않는 완전한 일치를 주장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통치하는 자치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도르노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20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예요. 아도르노는 지금까지의 모든 권력은 인간을 억압해 왔으며, 더는 그런 권력에 의존하며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보았어요. 칸트 같은 철학자도 따져 보면 자율주의, 무정부주의라 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의 철학에는 저항권이나 사회계약설, 국가 개념이 없거든요. 그냥 개인이 착하게 살면 된다는 거고, 국가 대신 세계 시민사회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미셸 푸코부터 무정부주의까지의 주장이 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죠? 네,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요. 현실을 인정하는 순자와 달리, 현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맹자는 이상주의자에 가깝지 않나요? 하지만 그 이상주의 맹자 철학이, 나중에 가서는 동양을 지배하는 성리학의 도덕적 이상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상주의처럼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