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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사생활과 그가 추구하는 반(反) 자본주의 사상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본인이나 가족들이 그 자신의 표현으로 ‘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삶을 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부인의 귀족 혈통을 자랑했으며, 굳건한 후원자였던 엥겔스의 정기적인 경제적 지원 외에도 여기저기에 돈을 빌리고 많은 외상을 지면서 한결같이 소비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삶을 추구했다.
소박하게 살았다면 엥겔스의 지원과 원고료만으로도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는 평생을 과소비를 추구했고, 어느 시대의 관점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는 ‘빈대’ 혹은 ‘진상’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흔히 마르크스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에는 그가 런던 생활에서 겪었던 극심한 생활고가 한몫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마르크스의 수입은 재정적으로 최악의 한 해였던 1851년에도 당시의 영국 중류계급 수준이었으며 허영을 버리지 못해 과다 지출로 인한 생활고를 겪었던 것이지 절대적 수준에서 못 먹고 못 입을 정도로 빈곤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 평전』에서 마르크스의 인간성이나 사생활이 아닌 사상 자체에는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므로 이 책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모습들은 저자의 이념적 편향으로 인한 것은 아닌 듯하다.
사실 통상적인 생활인의 수준에서 보자면 마르크스는 무슨 유별나게 악하다거나 추한 삶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저 본인이 살던 시대의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여러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었다는 자체가 웅변하듯이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고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이 한평생 추구한 혁명적인 사상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할 수 없는 추접스러운, 부르주아적 생활을 추종하는 스타일로 한평생을 살아내었으니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방탕했던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베를린 법대에서 아버지가 권유하는 학문을 성실히 익히려고도 해 보았으나 결국 다시 철학 쪽으로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유대인이었으나 동시에 프로이센의 군주제를 찬미하는 애국자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든 자유라 할 수 있겠으나 마르크스는 결핵에 시달리는 아버지에게 거의 편지를 쓰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한 해에 700탈러나 되는 돈을 탕진하며 아버지의 등골을 빨았다. 당시 가장 부유한 학생도 1년에 500 탈러 이하를 썼다고 하니 마르크스는 학생 시절부터 방탕한 소비 습관에 길들었던 모양이며, 심지어 부모가 간청하는데도 방학 때 트리어에 있는 집에 한 번도 다녀가지 않았다.
남작 가문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 이후 마르크스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혁명 활동에 참여하다가 1850년대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처음 거처를 마련한 곳은 런던 소호였다. 아내가 계속 임신을 하면서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는데 가족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마르크스 가족의 구원자는 유럽 대륙을 떠돌던 시절 파리에서 만난 평생의 친우, 엥겔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엥겔스는 런던에서 저널리스트로 입신하겠다는 야망을 친구를 돕기 위해 포기하고 아버지가 합자로 운영하는 직물회사 ‘에르멘 & 엥겔스’의 멘체스터 지사로 취직해 이후 20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때로는 자기 돈으로, 때로는 회삿돈을 횡령해 마르크스의 생활을 부조했다.
평생의 든든한 물주(호구?) 엥겔스
사실 엥겔스는 기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저널리스트로 성공할 만한 필력과 지식도 충분했다.
그는 자신이 영위하는 ‘천한 상업’을 ‘총명하지만 가난한 친구를 지원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행쯤으로 여겼고 자신을 궁극의 적인 부르주아 집단의 전선 배후에 침입한 비밀 요원 노릇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사업가들의 배타적인 고급 사교 클럽에 가입하고, 지하실에 고급 샴페인을 채우고, 사냥개들을 끌고 여우 사냥에 나서는 등 전형적인 영국 부르주아-귀족 계급의 삶을 살면서도 훗날 혁명의 날이 왔을 때 자신이 군사령관으로서 혁명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승마 실력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합리화했다.
엥겔스는 회사의 현금 상자나 계좌에서 교활하게 돈을 빼돌려 정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보내주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맨체스터의 동업자 페터 에르멘은 이를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으니 참으로 느슨하게 운영되는 회사였던 모양인데 그러고도 망하지 않고 번영했으니 신기한 일이다.
엥겔스는 ‘훗날 혁명의 때를 위해’ 여기저기 사교 생활을 해야 해 부유한 신사의 삶을 살아야만 했고 또한 맹우 마르크스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어야 했으므로 ‘엥겔스 & 에르멘’ 상회는 그에 의해 엄청난 돈을 횡령당했다. 1853년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에게 자랑했다.
“다행히도 작년에는 아버지가 이곳에서 벌인 사업에서 생긴 이윤의 반을 먹어치웠다.”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아버지의 동업자인 에르멘 씨는 무슨 횡액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마르크스 가족에게 매년 지원해 준 돈은 당시의 통상적 노동자들의 연 수입의 여러 배에 달하는 돈이었으나 마르크스와 예니는 마치 자신들이 여전히 부르주아 아버지, 남작 아버지를 둔 부자들인 양 돈을 헤프게 썼으므로 항상 ‘궁핍’했다.
마르크스 가족은 특히 궁핍했던 런던 생활 초기에는 방 두 개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가정부는 두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은 헬레네 렌헨 데무트였다. 그들은 굶어 죽어도 가사 노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가장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해로 꼽히는 1851년에도 그는 엥겔스와 다른 지지자들로부터 최소한 150파운드를 받았다. 이 돈은 현재의 한국 돈의 가치로는 적어도 4,000-5,000만 원은 되는 돈이었고 당시 런던의 중산층 하층에 속한 가족이 어느 정도 안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런던에서 의사·변호사들이 거주하는 넓은 정원과 여러 개의 방이 딸린 안락한 집의 집세가 1년에 65파운드가량이었다니 이를 최소한으로 쳐서 2,000만 원이라고만 잡아도 150파운드는 5,000만 원에 가까우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사실 런던에 연고도 없는 외국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아주 운이 좋았는데 1952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그를 유럽 통신원으로 임명해 기사 한 편당 2파운드를 받고 매주 기사 2편을 송고하기로 했던 것이다. 또한 1854년에는 브레슬라우의 ‘노이에 오더 차이퉁’에 기고해 매년 50파운드를 받았으므로 1852년부터는 마르크스는 매년 최소 200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던 것이며 이는 7,000-8,000만 원 가까이 되는 액수이니 충분히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누릴만한 돈이었다.
1854년 6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다급하게 돈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곤경에 처해 있네. 가계에 12파운드를 지출해야 하는데, 내 수입은 글을 쓰지 않아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약값만도 지출에서 많은 부분을 잡아먹고 있다네.”
그러나 편지의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마르크스는 아내와 아이들에 가정부까지 딸려서 에드먼턴에 있는 빌라로 두 주 동안 휴가를 떠날 예정이며, 아내가 시골 공기로 몸을 충분히 회복하면 독일의 트리어까지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조금 전의 호소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예니가 트리어로 여행 가기 위해 새 옷을 장만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사와 식료품상 등 마르크스의 채권자들은 그에 합당한 분노를 표시했는데, 마르크스는 그들의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남작의 딸이 초라한 행색으로 트리어에 도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라고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장했다.
모든 자본가와 귀족의 적인 마르크스로서는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부인이 독일 명문가의 딸임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예니의 명함을 ‘예니 마르크스 부인. 구성(舊姓) 베스트팔렌 여남작’이라 박아놓고 자신과 거래하는 상인들이나 사교차 만난 토리당원들에게 이 명함을 자랑스럽게 휘둘렀다.
마르크스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생활’을 누리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남작 가문의 딸인 부인이 ‘신분’에 걸맞은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아내를 바닷가로 휴양 보낸 다음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안사람은 램즈게이트에서 세련되고, 또 끔찍한 말이기는 하지만, 영리한 영국 여자들을 사귀었네. 오랫동안 여자들을 사귄다 해도 자신보다 열등한 여자들하고만 사귀고 난 뒤라,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니 그것이 안사람에게는 좋은 모양이야.”
마르크스는 부인에게 ‘상류 계급’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들만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아닌 상류계급과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딸들이 적당한 구혼자들을 주위에 끌어들이려면 무도회 드레스, 댄스 교습을 비롯해 돈으로 살 수 있는 기타 사교적 장치들이 필요했는데, 이는 중산층 정도의 수입을 지닌 그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소비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무한정 구걸해야 했다. 물론 그 구걸 대상은 대체로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1865년에 북런던의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 집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이것이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장차 안정된 미래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세… 상업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순수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적당치 않네. 물론 안사람과 나 둘만 있다면, 또는 아이들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면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네만, 자네도 나와 같은 의견일 것으로 생각하네.”
사람 좋은 엥겔스는 딸들이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분기에 8파운드를 내는 ‘숙녀 학교’에 다녀야 하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음악, 미술의 개인 교습까지 받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한 번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도 그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무리였다.
1855년 봄에 마르크스는 환희에 넘쳐서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어제 우리에게 아주 행복한 사건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네. 안사람 삼촌이 돌아가셨다네. 향년 90세.”
그는 죽은 사람─예니의 삼촌이자 변호사이며 역사가인 하인리히 게오르크 폰 베스트팔렌─에게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었지만, 이 노인의 재산을 상속받기를 오랫동안 고대하며 노인을 ‘상속 훼방꾼’이라 수년간 지칭하고 있었으므로 그 고대하던 노인의 죽음에 열광할 만도 했다. 유산 중 예니의 몫 100파운드가 그해 연말에 도착했다.
마르크스의 재수가 몹시 좋았는지 그다음 해에는 예니의 어머니인 남작 부인도 연속적으로 사망해 12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친정어머니의 마지막 며칠 동안 병상을 지키기까지 했으므로 장모의 죽음에는 차마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못했으나, 마르크스는 아내가 모친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놀랍다는 듯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안사람은 노인의 죽음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 같네.”
하기야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은 냉담한 성격이었으니 어머니의 죽음─그로 인해 수천만 원 치의 목돈이 굴러들어왔음에도─에 슬퍼하는 아내에게 놀랄 만도 했을 것이다. 아내의 외삼촌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굴러들어 온 220파운드에 달하는 이 ‘횡재’ 덕에 마르크스 일가는 소호에서 나와 북런던 그래프턴 테라스의 보다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아내가 받은 유산은 그동안의 빚을 청산하고 집을 얻고 새 가구를 장만하는데 금새 다 써버렸으므로 새로 장만한 가구는 다시 전당포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집의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엥겔스에게 징징거려 매달 5파운드(150만 원가량)의 돈을 받고 필요할 때마다 추가로 받기로 했다. 엥겔스는 그때 아버지가 보내준 크리스마스 축하금으로 새로운 말을 장만했던 터였으므로 친구의 불행에 몹시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했고 회사의 사정이야 어찌 되든 회삿돈을 금고에서 횡령해 보내주기로 굳게 약속했다.
마르크스가 평생 물주친구 엥겔스를 잃을 뻔했던 사건
엥겔스는 1863년 1월, 사실상 아내나 다름없던 메리 번스가 사망했을 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마르크스에게 보냈다.
“메리가 죽었다네… 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 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네. 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마르크스는 다음 날 답장을 보냈는데, 의례적인 조의를 한 마디 표한 후 곧바로 아이들 학비와 집세 독촉으로 힘들다는 푸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
엥겔스는 닷새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아래와 같이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 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 내 모든 친구와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인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랬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 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줄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럼 그렇게 하게나!”
사람 좋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3주 동안 마르크스는 돈이 너무도 궁해 예니와 엄청난 부부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엥겔스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으며 딸들은 가정교사 일자리를 구하고 자신들 부부는 막내딸을 데리고 런던의 빈민 구호 시설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고 비참한 상태를 알렸다. 이 편지는 마르크스가 타인에게 했던 단 한 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는데, 아마도 돈이 궁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결코 사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그러운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과에 감동해 ‘엥겔스 & 에르멘’ 사의 금고에서 100파운드짜리 수표를 훔쳐 배서한 다음 마르크스에게 보내주고는 말했다.
“나로서는 매우 과감한 행동이지만, 모험을 할 수밖에 없지.”
또한 몇 달 뒤에는 마르크스가 여름을 날 수 있도록 250파운드를 보내주었다. 회삿돈을 횡령했을 것임은 명백하다.
메리 번스의 죽음에 “우리 엄마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투덜대었던 아들의 말이 씨가 되었는데 그해 11월에 마르크스의 어머니 헨리에테 마르크스가 향년 75세로 사망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이 소식이 왔을 때 마르크스는 아무런 슬픔의 표현 없이 냉랭하게 썼다.
“운명이 우리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을 요구했네. 나 자신도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보다는 나를 더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
이번에는 유산을 받아야 했으므로 독일 트리어로 돌아가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엥겔스는 여비에 보태 쓰라고 10파운드를 보냈지만, 마르크스의 냉담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의의 문구 같은 것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유언장 집행에는 여러 달이 걸렸으며 그동안 외삼촌 리온 필립스에게 결국 꾸어다 쓴 빚 등 여러 채무를 청산하고 나니 100파운드 정도만이 손에 남았다.
마르크스는 이 돈을 가지고 또다시 분수에 넘치는 집으로 이사했는데 이곳은 집세가 연간 65파운드로 넓은 정원, 매혹적인 온실, 딸마다 자기 방을 가질 만한 넓은 실내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공원을 내려다보는 2층에는 마르크스의 서재가 될 널찍한 방이 있었다. 이곳은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들이 사는 곳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아무 대책 없이 덜컥 이 집에 3년 계약을 맺고 입주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타인의 죽음이 마르크스에게는 행운을 안겨주었는데, 바로 독일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동참했던 맹우 빌헬름 볼프가 1864년에 그에게 많은 돈을 남기고 사망했던 것이다. 볼프는 브뤼셀에서 ‘공산주의자 통신 위원회’ 일을 할 때, 1848년의 파리 혁명 때, 쾰른에서 ‘노이에 라이니세 차이퉁’ 일을 할 때 늘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했고 1853년부터는 맨체스터로 망명해 외국어 교사 일을 하며 마르크스와 달리 혼자서 근검절약하며 조용히 살았다. 그는 유언집행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지명했는데, 장례비용과 유산 상속세, 주치의에게 남긴 100파운드, 엥겔스에게 상속된 100파운드(이 돈은 어차피 나중에 마르크스에게 올 돈!)를 제하고도 마르크스에게 820파운드라는 거액의 돈이 남았다.
이 돈은 현재의 한국 돈으로는 적어도 2-3억 원의 가치는 있는 돈이었는데, 마르크스는 볼프가 주치의에게 100파운드를 남긴 것에 몹시 화를 냈다. 하기야 본인의 주치의에게는 유산은 커녕 정당한 치료비조차 지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으니 그에게 와야만 할 돈 100파운드(약 3,000만 원)를 주치의에게 남긴 볼프의 유언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볼프를 기념해 3년 후에 출판된 『자본론』 1권에 ‘프롤레타리아의 용맹하고 충실하고 고귀한 옹호자인 내 잊을 수 없는 친구 빌헬름 볼프에게’ 바치는 헌사를 넣었는데 사실 이 헌사는 엥겔스가 받아야 더 마땅한 것이었다. 아무튼 마르크스 부부는 볼프의 유산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새 집에 비싼 가구를 들이고 아이들에게는 애완동물을 떼거지(개 세 마리, 고양이 두 마리, 새 두 마리)로 사다 주고, 해변으로 가족 모두가 3주 동안 여행을 떠났다.
주식투자가 마르크스
빌헬름 볼프가 죽은 1864년 여름에 마르크스는 외삼촌 리온 필립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볼프의 유산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음을 자랑했다.
“많이 놀라시겠지만, 저는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채에도 하지만 주로 영국 주식이지요… 어쨌든 저는 주식 투자로 4백 파운드 넘게 벌었습니다. 이제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여기저기 틈이 많기 때문에 저는 다시 투자를 시작해 볼 작정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조금만 써도 되는 일이고, 또 적으로부터 돈을 우려내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그는 주식 투자가 ‘적(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돈을 우려내는’ 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자본가인 외삼촌이 이 편지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으므로 외삼촌을 놀래기 위해 지어낸 농담으로 간주하기도 했는데, 엥겔스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보면 마르크스가 볼프의 유산으로 주식 놀음을 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는 볼프의 유산에서 나올 다음 지급액을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며 이렇게 엥겔스에게 말했다.
“돈이 있었다면 지난 열흘 동안 이곳 증권거래소에서 큰돈을 벌었을 걸세. 런던에는 수완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는 때가 다시 왔네.”
주식으로 끝끝내 돈을 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볼프의 ‘거대한’ 유산도 마르크스 부부의 방탕한 생활에는 금새 녹아내렸다. 1년이 지난 1865년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다시 돈을 구걸하며 이렇게 썼다.
“두 달 동안 나는 오로지 전당포에 의지해서 살았네. 채권자들이 줄을 서서 문을 두드리는데 날이 갈수록 견디기가 힘들어지네.”
마르크스 부부는 1년 동안 최소 3억 원가량의 돈을 탕진해버렸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인생 역전
마르크스가 52세가 되던 1870년 여름, 그는 드디어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업인 ‘에르멘 & 엥겔스’의 지분을 에르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는 이 돈으로 ‘궁핍한’ 친구 마르크스에게 1년에 350파운드의 종신 연금을 선물해 주었다! 현재 한국 돈 가치로는 적어도 매년 1억 2,000만 원에 해당하는 수입이었다.
얼굴이 두껍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마르크스도 이 정도 후의에는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네의 엄청난 호의에 압도당하고 말았네.”
이후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마르크스보다 오래 산 엘레아노르와 라우라의 두 딸은 아버지의 사후에 각각 자살했다. 맏딸 라우라는 1911년에 66세로 파리 외곽에서 남편 폴 라파르그와 함께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서’ 자살했는데, 주로 엥겔스의 돈에 기생해 생계를 유지했다. 엥겔스는 친구의 유족들까지도 돌보았던 것이다. 라우라 부부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맡았던 사람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으로 그는 “라우라 선친의 사상이 누구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거침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고 그 예언은 수년 후에 실현되었다.
로버트 오웬의 전혀 다른 삶
마르크스의 삶은 사회주의 사상가로서는 한 세대 앞선 선배인 로버트 오웬의 생애와 극명히 대비된다. 로버트 오웬은 1771년 웨일즈의 한 철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의 나이에 링컨셔의 직물 상인의 도제로 들어가 18세 되던 해에 100파운드를 빌려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100파운드는 마르크스라면 한두 달에 다 탕진해 버릴 돈이다).
오웬은 차츰 사업에 성공해 종업원이 500명이나 되는 면방적 공장의 주인이 되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윤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대신 자신이 혼자서 공부한 사회주의 이론을 자신의 기업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도덕적, 경제적 수준을 향상하고, 민중 계급의 불행과 타락의 가시적 원인인 빈곤과 무지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오웬은 자신의 공장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가구당 채마밭을 하나씩 주고, 당시 하루 15시간이 관행이었던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했다. 7세 아동이 광산에서 일을 하던 당시에 직업 교육을 받기 전인 10세 이전의 아동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생필품을 일정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협동조합, 작업장 내의 위생 시설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이로 인해 마을의 복지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뉴라나크 마을은 매년 2,500여 명의 사람들이 시찰하는 명소가 되었다.
유니레버 사의 설립자인 윌리엄 헤스커스 레버도 오웬의 실험에 감명을 받아 그의 공장의 근로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오웬을 본따 노동자들이 거주할 안락하고 쾌적한 마을을 건설했다. 그러나 오웬은 이러한 ‘단일공장 사회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좋은 대접을 받는 노예’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으고 유럽의 모든 정부에 탄원서를 발송해 그가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했던 ‘자치공동체’ 건립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824년에서 1828년에 걸쳐 미국 뉴하모니에서 생활과 노동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건립했고, 소수의 사람을 재산과 종교, 결혼 같은 ‘장애물’이 없는 환경 속에 두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노동하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평균적 인간이 필요의 지배를 넘어서 풍요와 지식, 연대의 지배를 실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으나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들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실험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공동체 실험의 실패 후 오웬은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 노동조합 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노동계급이 정치 사회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온건한 방안에 호소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노동조합운동의 틀 내에서 노동시간의 제한을 위한 운동을 전개해 노동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의 조직에 기여했다. 말년에는 신비주의에 빠졌다는 비아냥도 받았으나, 지행이 일치한 자수성가자 로버트 오웬의 삶은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귀족과 자본가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동경하며 평생 가족과 친구들의 골수를 빼먹고 산 카를 마르크스의 삶과 극명히 대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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